시승차에서 내려 잠시 동안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다른 차에서 내린 기자들 사이에서 잘 만들어졌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제네시스에 밀리는 건 엠블럼 뿐이라는 농담이 오고 가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신형 K9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아의 새로운 플래그십 세단. 재미를 보지 못한 1세대 K9 때문일까. 신형 K9은 한마디로 와신상담(臥薪嘗膽) 한 모습이다.

서울 잠실에서 강원도 춘천까지에 이르는 왕복 154km 구간에서 K9 3.3 마스터즈 AWD 모델을 시승했다.

■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디자인

“이거 신형 K9이죠? 실물은 저도 처음 봤네요...조금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휴게소에 잠시 차를 정차한 상황. 아까부터 뒤를 따라오던 흰색 K9이 기자의 시승차 뒤로 차를 세웠다. K9 3.8을 타고 있다는 차주는 자신의 차와 신형 K9을 번갈아가며 비교했다.

같이 놓고 보니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기존의 디자인을 계승⋅발전시키는 최근 현대기아차의 디자인 방향성과는 달리, 신형 K9은 말 그대로 ‘신차’ 그 자체였다.

둥글둥글한 곡선이 가미된 신형 K9의 헤드램프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전 세대는 역동성이 가미됐지만, 신형은 그보단 부드럽고 우아한 이미지를 강조한다.

보다 커진 라디에이터 그릴은 고급차로서의 존재감을 뽐낸다. 위 아래로 조금 더 길었다면 더 웅장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보여지는 디자인으로도 충분히 기품있다.

측면에서 바라보니 길어진 휠베이스와 더 넓어진 창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를 따라 흐르는 옅은 포물선의 캐릭터 라인은 중후함을 더한다.

K9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뒷모습.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의 테일램프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정말 보수적인 색채를 보이는 디자인 포인트다. 고급차의 주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을 것 같다.

크롬 소재의 사용 빈도가 높았던 1세대 K9과는 달리, 신형 K9은 이보다는 차분해진 모습이다. 작열하는 햇빛에 눈이 부실 정도의 크롬이 아닌, 한 톤 정도 낮은 반광 소재의 크롬을 적용했다.

■ “우리가 구현할 수 있는 ADAS는 다 들어갔습니다”

화려하다. 과장된 느낌은 없이 정제된 실내 패키징이 눈에 들어온다.

버튼은 용도에 따라 알맞게 배열됐고, 눌러지는 압력 하나하나도 세밀하게 조율된 느낌이다.

우드 소재와 가죽 등 손이 닿는 부분들의 터치감도 만족스럽다. 스피커 덮개에도 메탈 소재를 적용하는 등, 최고급 소재는 아낌없이 들어갔다. 도어 패널에 적용된 독특한 형태의 퀼팅 패턴도 눈길을 끈다.

조명은 K9의 감성품질에 큰 역할을 한다. 버튼에 손을 가까이하면 버튼 조명이 밝아지는 인터랙티브 무드 조명, 팬톤 색채 연구소와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 앰비언트 라이트 등은 운전자의 만족도를 높이기에 충분하다.

광활한 12.3인치 디스플레이는 시인성이 높다. 돌출형으로 설계된 탓에 시야에 방해되는 일도 없다.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며, 중앙 콘솔의 컨트롤러, 터치 등 두 종류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특히,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설정할 시 출발지와 목적지의 날씨를 동시에 보여주는 기능은 항공기를 연상시킨다. 기능의 목적도 충족하지만, 비즈니스 세단으로서의 디테일한 배려도 엿보인다.

2열 좌석은 개별 제어가 가능한 리클라이닝 기능이 적용됐다. 휴식 모드를 선택할 경우 조수석 시트를 앞으로 최대한 밀어낸다. 그럼에도 운전자의 시야는 방해하지 않는다. 키 181cm의 기자가 다리를 꼬고 앉을 정도로 여유있는 공간이 나온다. 오너드리븐 세단을 지향하지만, 2열의 쇼퍼드리븐 오너들에게도 적합할 듯 하다.

후석 무선충전포트도 아이디어가 좋다. 스마트폰이 점차 커짐에 따라 차량의 무선충전 패드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K9의 2열 무선충전패드는 이를 고려해 덮개를 제거할 수 있도록 했다.

‘드라이브와이즈’로 명명된 주행보조시스템은 기아차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이 집약됐다는 게 기아차 측의 설명이다. K9은 총 13개의 주행보조시스템이 탑재됐다.

차로유지보조(LFA), 전방/후측방/후방교차 충돌방지보조(FCA/BCA-R/RCCA), 안전하차보조(SEA),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NSCC) 등은 전 트림에 기본 적용됐으며, 후측방모니터(BVM), 터널연동 자동제어 하이빔 보조(HBA), 운전자주의 경고(DAW) 등은 옵션으로 운영돼 가성비도 잡았다.

■ 정확한 타협점을 잡은 주행성능

고급차를 찾는 국내 고객들의 니즈는 정숙성과 승차감에 집중되어있다. 때문에 국산 고급차는 정숙성과 승차감이라는 여건에선 그 어떤 수입차들보다 엄격한 것이 사실. K9도 그렇다.

다소 단단한 느낌이 강조된 제네시스 G80보단 부드럽다. EQ900에 가까울 만큼 보수적이다.

시승 차량은 3.3 가솔린 터보 엔진을 장착, 최고출력 370마력, 최대토크 52.0kg.m의 넉넉한 출력을 발휘하지만, 엔진의 회전 질감과 응답성은 부드러움에 집중됐다. 그럼에도 규정 속도 내에서 추월을 시도하다 보면 어느새 저 만치 가있는 속도계에 당황하게 된다.

EQ900에 준하는 덩치를 가졌지만, 시내 주행에서의 움직임은 제법 가볍다. 스티어링 휠 자체의 무게감도 제법 가볍게 세팅된 탓에 끼어들기와 가다 서는 상황이 반복되는 도심 주행에선 편리했다.

고속 주행과 와인딩 로드를 주행하는 상황에선 반전이다. 스티어링 휠은 단단해지고 스포츠모드에서의 엔진 응답성은 스팅어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하체의 세팅도 기본적으론 컴포트한 성향이지만, 잔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정신없이 휘청대지 않는다.

때문에 코너가 반복되는 와인딩로드에서도 제법 자신감 있게 운전할 수 있다. 편안히 주행할땐 지극히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더니, 출럭을 조금씩 끌어올릴 때 마다 제법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승차는 사계절용 타이어가 적용됐지만, 놀랍게도 K9은 옵션 사양으로 여름용 고성능 타이어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런 보수적인 세그먼트에서 제법 재밌는 운전이 가능하겠단 짐작이 가는 이유다.

주행보조시스템의 신뢰도도 높다. HDA 작동 시 스티어링을 떼고 있는 시간도 상당히 길어졌다. 딴짓을 하면 안되지만, 운전 중 핸들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제법 기특하다.

차선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다. 선행 차량의 궤적을 따라 가상의 차선 중심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 제네시스에 밀리는 건 엠블럼 뿐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굳이, 정말 억지로 흠을 잡자면 기아 엠블럼이 달렸다는 것.

8000만원에 육박하는 고급차가 봉고, 그랜버드와 같은 엠블럼을 달고 있다는 점. 제법 그럴싸한 제네시스 배지를 두고 망설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싸구려 브랜드의 고급차’라고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보여지는 걸 중요시 하는 이 층의 소비자들이 같은 예산으로 EQ900과 K9을 고민할 것인가의 문제다.

물론, 기아차는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별도의 엠블럼을 부착할 계획까지 있었다. 무산됐지만, 기아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K9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초 K 시리즈는 기아의 K에서 유래됐다. 기아의 이름을 걸고 만든 차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차명과 엠블럼을 버리지 않은 것. 기아차는 그 시간과 비용, 인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헤리티지를 유지하는 방향의 ‘정공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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