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100km 북쪽에 있는 한 마을에서 83세의 노인이 벌써 35년째 지하 4.2m 깊이에 5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를 운영하고 있다고, 캐나다 CTV 뉴스와 일간지 내셔널 포스트가 보도했다.

지하에 묻은 스쿨버스 간이 침실에 선 브루스 비치/doomsdaypreepers.wikia.com


브루스 비치(Beach)라는 이 노인과 아내는 호닝스밀스(Horning’s Mills)라는 곳에 있는 보유한 약 5만600㎡(약 1만5300평)의 사유지는 표면상 녹색 잔디가 펼쳐진 일반 시골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밑에는 사실 ‘제2의 노아의 방주’라 할 만한, 북미 대륙에서 가장 큰 민간 핵폭탄 대피소가 은폐돼 있다.

캐나다 호닝스밀스의 사유지에 42대의 스쿨버스를 묻어 지은 대규모 대피소의 1980년대초 건설 모습. / Bruce Beach 사이트


비치(83) 씨는 모두 42대의 낡은 ‘스쿨버스’를 4.2㎡ 지하에 묻었다. 이 버스들은 각각이 물탱크·식량창고·의료시설·보일러·세탁실·오락여흥 시설·유아시설·아이들방·식당 등으로 나뉘어 있고 몇 대의 스쿨버스 ‘통로’를 통해 연결돼 있다. 이 핵폭탄 대피소는 한꺼번에 500명을 수개월 수용할 수 있다고.

‘제 2의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대피소는 500명의 사람들을 몇 달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Bruce Beach 사이트


비치 씨가 ‘제2의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를 시작한 때는 1980년, 미·소의 냉전(冷戰)이 절정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1960년대까지 전기 기술자로 미국 시카고에서 살다가, 핵무기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한 캐나다의 시골로 1970년에 이주했다. 그리고 아내 진 비치(90)를 만나 그의 가족 소유의 땅을 이용해 대피소를 만들기 시작해 2년 뒤인 1982년에 1차 완공했다.

하지만 이후 30여년간 핵전쟁은 발발하지 않았고, 당시 구축한 시스템은 모두 낡은 것이 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시엔 최신 PC였던 8비트짜리 ‘코모도어 64’ 컴퓨터와 모니터에, 통신선도 지상 통신선과 연결된 다이얼식 전화기다. 또 대피소를 실제 쓸 일이 없으면서, 비축한 식량만도 매년 수 톤씩 버려지고 있다고.

이 지역 소방 공무원들은 이 ‘대피소’ 자체를 위험 건물로 판단해 폐쇄하기를 원하지만, 비치는 “만약 닫게 된다면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피소만큼은 다시 열 것”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제2의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 자체가 캐나다 연방·지방 정부의 허가 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이미 법정에만 30회 이상 출두했다. 하지만 그는 “‘핵전쟁 대피소는 생사가 달린 문제라, 정부의 허가를 기다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노아 프로젝트’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어, 다른 ‘종말 대비’ 생존주의자들이 이 대피소의 일부 구역을 쓰기도 한다. 2015년엔 이 지하 대피소에서 ‘생존과 만남 엑스포(The Canadian Survival & Meeting expo)’가 열리기도 했다.

비치 씨는 캐나다 일간지 내셔널 포스트에 “나는 전엔 세상의 종말이 ‘2년 뒤’라고 말했었지만, 이제는 ‘2주 뒤’로 예측한다”며 “틀렸다면 종말 날짜를 재조정하면 되고, 세상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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