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조선
[Why] 폭탄주, 회식, 눈치… '푸상무'의 한국 향수병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한국 대기업서 3년… '푸상무 이야기' 쓴 前 현대차 임원 프랭크 에이렌스
워싱턴포스트 경제부 기자에서 전업, 서울 발령 난 아내와 함께 한국行
"전쟁같은 경험 했지만, 한국은 내 인생의 아주 쓴 보약"
첫 출근 당시 그는 한국인들이 사는 바다에 표류해 들어온 외로운 미국인이었다. 며칠 동안 숱한 미스터 김, 미스터 리, 미스터 박을 만났다. 근무 시간은 월요일 아침 8시 전에 출근해 금요일 저녁에야 끝났으며 마치는 시간은 상사가 정했다. 환영 회식에 미국식 파티를 생각하고 아내를 데려갔는데 동료들은 눈치를 주며 부어라 마셔라 취해갔다. 술이 나오는 노래방에서 2차가 끝나자 그는 애원하다시피 했다. 집으로 보내달라고. 3차가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프랭크 에이렌스(54)는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18년 일하다 2010~13년 현대자동차에서 글로벌 홍보를 맡아 상무까지 승진했다. 직장에서는 '푸상무'라 불렸다. '프랭크'와 '상무'를 합친 호칭이다. 에이렌스는 350년 전 조선에 떠밀려온 하멜처럼 고국으로 돌아가 표류기를 썼다. 영문판 원제는 '서울맨(Seoul Man)', 최근 국내에 나온 번역서 제목은 '현대자동차 푸상무 이야기(프리뷰 刊)'다.
그가 서울에서 허우적거리며 겪은 한국과 한국인, 한국 대기업은 기이한 모습이다. 때론 우스꽝스럽고 낯뜨겁다. 글로벌하게 물벼락을 뒤집어쓴 기분이랄까.
지난 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그를 만나 뭐가 그토록 충격적이었는지부터 물었다. "일터와 회식 자리가 영 딴판이었어요. 사무실은 고요하고 재미없는 곳이라면 술자리는 시끌벅적하고 유쾌했습니다. 놀라운 부조화랄까요. 양복 입고 일하다 훌훌 벗고 수영장으로 뛰어든 것 같았습니다."
한국, 비슷하지만 좀 부족한 나라
에이렌스는 아내가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발령나면서 이직을 결심했다.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로 도약을 시도하던 현대차도 워싱턴포스트 경제부 기자 출신으로 자동차 업계를 담당했던 그의 경험과 인맥이 필요했다. 결혼 3개월 만에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13시간 떨어진 서울에 들어와 3년 2개월을 살았다. 한국살이 총평은 '비슷하지만 조금 부족한(Almost, not quite)'라는 표현에 응축돼 있다.
―뿌리째 뽑혀 옮겨간 낯선 나라에 대해 사전지식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요?
"미국인에게 한국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는 삼성과 김정은이에요. 많이 알진 못해도 제가 평균 이상은 될 겁니다.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 용사였어요. 저는 1970~80년대 미국에서 인기 있던 TV 코미디 '매시'(6·25 때 서울 야전병원이 배경이었다) 애청자였고요. 드라마 '로스트'의 배우 김윤진, K팝,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출근 첫 주 풍경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손바닥을 세우며) 동양 기업 문화는 CEO부터 아래로 상당히 수직적이에요. 반대로 서양은 좀 더 수평적입니다. 수평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이 수직적인 문화와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충돌하는 거죠."
―TV나 광고로 본 한국과 실제가 달랐나요?
"미디어에 비친 서울은 10년 뒤 미래 사회 같았습니다. 기대치가 높았죠. 그런데 실제론 뭔가 빠져 있거나 이상한 장면과 마주쳤어요. 음성 메시지가 한 통도 안 오고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데 여성 청소부가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환영 파티 자리에 아무도 배우자를 데려오지 않았습니다(웃음). 미국에서는 당연한데 한국에선 무례하거나 최소 이상한 짓이 된 거죠."
―한국 대기업에서 일하며 배운 것도 있나요?
"중요한 경영 수업을 받았어요. 바로 리더십입니다. 이사 직책으로 처음 출근해서 허물없이 '그냥 프랭크라고 불러주세요' 한 게 실수였어요. 팀원들은 그 호칭을 불편해했고 팀의 위상이 떨어졌다고 여겼습니다. 지휘권이라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배운 셈이에요."
―음주 문화에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만.
"(한숨을 쉬며) 지금의 견해를 갖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소주는 단순히 술이 아니더라고요. 저는 술을 그닥 즐기지 않아요. 폭탄주를 돌리며 강권하는 데 경악해 '이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항의했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날 나타난 '낙하산'이 그렇게 지적질을 하니 분위기가 망가졌죠. 이젠 압니다. 회식과 음주가 팀워크와 생산성을 높여주고 우의를 다지는 문화라는 걸."
―어떤 의미에선 진화(進化)했군요.
"네. 다만 일상적 음주가 아니라 특별한 자리로 만들어야죠. 매일 밤 12시까지 마시면 가족과 보낼 시간이 축나니까요."
―책에 ‘60년 전 최빈국에서 이젠 부유한 나라가 됐지만 한국인의 삶은 그때와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고달프다’고 썼더군요.
“끊임없는 경쟁 속에 살면서 온갖 육체적,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니까요. 제겐 악몽 같았던 토요일 회사 단체 산행도 그랬어요. 어떤 삶의 목표를 향해 올라 반드시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강박 말입니다.”
“좌절한 날을 ‘코리안 데이’라고 불러”
그는 글로 먹고살아왔다. 책을 쓰려면 독자를 낚아챌 주제가 필요하다. 현대자동차 본사에서 3년2개월 근무한 푸상무는 ‘중년의 위기’라는 매력적인 키워드를 발견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전직을 감행한 나는 물론, 한국과 현대차도 인생 2막과 같은 위기를 겪고 있었다”고 했다.
―현대차와 한국은 왜 중년이죠?
“한국을 떠나기 6개월 전 그곳에서 겪은 일을 돌아봤어요. 글쓰기에도 운전대가 필요합니다. 1967년 창업한 현대차는 당시 저렴하고 쓸 만한 차를 만든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프리미엄 자동차 기업으로 도약하는 중이었죠. 현대적인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1961년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1963년생이고요. 그렇게 일렬로 세우니 방향성이 생겼습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첫 1년은 머리를 벽에 계속 부딪치면서 보낸 셈이죠. 직장에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좌절감을 맛보는 날을 ‘코리안 데이’라고 불렀습니다(웃음). 그만둘까 말까 흔들리며 6개월이 지났고 12개월쯤 돼 얼추 적응했고, 18개월쯤 흐르자 유능한 임원이라는 자긍심이 생겼지요. 그래서 다시 2년 계약하고 상무로 승진한 겁니다.”
―결국 중년의 위기를 뚫었네요.
“한국에 온 뒤 첫딸이 태어났는데 아내가 인도네시아로 전근 가면서부터 기러기 아빠 신세였죠. 힘겨웠습니다. 지금은 워싱턴에 모두 모여 살지만 아내는 미국 국무부를 퇴직하면서 경력이 단절됐어요. 훌륭한 아내이자 두 딸의 엄마지만 직업적으론 충족되지 않는 삶입니다. 한국 여성들에겐 흔한 일이지요. 우리 부부가 중년의 위기에 대처한 것에 학점을 매긴다면 B마이너스쯤 됩니다.”
―현대자동차에는 어떤 학점을 줄 만한지.
“B플러스요. 기름값이 떨어졌는데 SUV 붐에 올라타지 못했다는 점에서 A를 받긴 어렵습니다. 산타페와 투싼뿐이니까요.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로 촉발된 갈등으로 중국 시장에서도 불리해졌습니다.”
―한국은 어떤 단계인 것 같나요?
“여전히 성장 중이에요. 정치적으로 큰 혼돈을 겪었고 새 대통령은 재벌 저격수(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를 고용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못한 것을 문재인 대통령이 할 수 있을까요? 재벌이 무너질 것인지 재편될 것인지, 다원화된 경제구조를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두고봐야죠.”
―한국만큼 고속 성장한 나라는 없지요. 부모는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자식은 15시간씩 공부하며 경쟁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하는 ‘야곱의 사다리’로 표현했더군요.
“미국은 오래전 이륙한 비행기처럼 순항고도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는 나라예요. 문제는 그 상태가 지속돼 비행기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겁니다. 한국의 경우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자세 못지않게 좀 쉬어도 된다는 믿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압축성장하는 동안 자살률이 높아졌고 절차를 무시하다가 세월호 비극을 겪었잖습니까. 조금 늦게 가더라도 노동과 휴식 사이 균형이 있었으면 해요.”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지적이군요.
“현대자동차에서도 절감한 의문인데 빨리 하는 게 중요한가요, 잘하는 게 중요한가요? 후자라고 봅니다. 집에서 배관을 수선하는 것과 같아요. 빨리 고치면 좋지만 상상해보세요, 6개월 뒤 파이프가 터져 물난리를 겪는다면 또 어떨지.”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
한국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이다. 당장 핵과 미사일 위기를 겪고 있다. 지금 서울을 생각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냐고 묻자 “김정은이 오판할 수도 있다”며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긴장 국면에 대한 경험이 만성화해 한국인은 거의 동요하지 않아요.
“과거보다 심각해 보이는데 참 이상해요. 이재용 부회장이 수감 중인데 삼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가가 고공비행하고 엄청난 순이익이 나는 것도 어리둥절한 일입니다.”
―한국에서 겪은 일 가운데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나요?
“납득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정보가 흘러가는 방식입니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우리집이 있던) 용산 미군기지 입구의 한국인 직원은 8시간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어떻게 주적(主敵)의 죽음을 아무도 그에게 전하지 않았을까요. 북한과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한국인들의 믿음을 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일할 때 가장 어려운 게 뭐였나요?
“(오래 뜸을 들이다) 인정하는 거였습니다. 내가 다 잘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미국이 한국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오만했던 겁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에서 자주 화가 났고 좌절했어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게 어려웠습니다. 거울 속 사내가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아내는 저를 한국 직장 문화에 떨어진 ‘아메리칸 폭탄’이라 불렀습니다(웃음).”
―2011년 디트로이트 모터쇼를 앞두고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에게 연설 연습을 시켰죠?
“명료한 영어 문장으로 다듬고 호소력 있게 표현하는 게 제 임무였으니까요. 동료들은 ‘공자님에게 팔굽혀펴기를 스무 번 하라고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가 지휘 계통 건너뛰고 정 부회장과 직접 대화하는 철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는 연설을 아주 잘 해냈어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한테 ‘체어맨(회장)’이란 이름을 붙였죠.
“하하하. 한국에서 두 번째로 입양한 개 이름이 ‘채움’이었어요. 지금도 같이 살아요! 한국어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앉아’ ‘기다려’ 해야 알아듣죠. 그래서 ‘채움’과 비슷한 영어 이름을 지으려고 했어요. 특별히 힘들었던 ‘코리안 데이’를 겪고 퇴근해 떠오른 이름이 ‘체어맨’이에요. 회장님에 대한 존경과, 바늘로 쿡 찌르는 불손함이 완벽하게 조화된 작명이죠. ‘체어맨, 이리 와!’ 부르니 기분이 풀렸어요. 팀원들은 개 이름을 듣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어요.”
―어떤 표정이었나요?
“웃으면서도 겁먹은 표정? 하하하.”
“한국 생활 3년이 내 인생의 보약”
에이렌스는 워싱턴 DC에 있는 홍보회사 ‘BGR’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다. “직원이 25명인, 현대자동차에 비하면 구멍가게”라고 했다. 그는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 진출하는 기업에 문화 격차를 극복하는 법도 일러준다”고 말했다.
―한국 직장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마스터했나요?
“눈치 말하는 건가요? 한국에선 상사가 ‘자네, 내일은 하루 쉬지’ 말하면 ‘아닙니다’를 3번은 복창해야 하잖아요. 저는 사실 눈치가 없었습니다. 남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아직도 부족해요.”
―한(恨)이 뭔지도 압니까.
“집단적인 우울감, 불행을 모두 함께 겪었다는 정서입니다. 흥미로운 건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에 속해 있던 나라들과 달리 한국의 한은 비관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술자리에서 한이 튀어나오고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이튿날 아침 회사에 멀쩡히 출근해 일하죠.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셈입니다. 한국을 보면 어떤 역사를 가졌다고 해서 미래를 넘겨짚을 순 없는 것 같아요.”
―‘경쟁에서 질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현대자동차와 한국을 이끄는 힘’이라고 썼습니다. 미국인은 그런 공포 없나요?
“미국은 지금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옛날처럼 세계의 리더 역할을 더 이상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존재해요. 그러니까 일자리와 더불어 강한 미국을 만들어주겠다는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에 환호한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젠 우리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도 많아요.”
―한국인이 쓰는 콩글리시를 배우는 대목을 읽다 배꼽을 잡았습니다.
“한국어는 동사가 끝에 오지요. 그래서 한국인은 영작할 때 늘어지는 수동태를 만들곤 합니다. 제 주업무는 그걸 짧은 능동태로 바꾸는 일이었어요. 한국인들은 학교에서 똑같은 문장을 배우나 봐요. 주말에 뭐할 거냐고 물으면 임원부터 말단까지 답이 한결같았어요.”
―뭐라 하던가요?
“쉴 거야(I’m going to take a rest). 하하하. 뭘 하면서 어떻게 쉴 건지는 절대 말 안 합니다.”
―한국 추억 중 그리운 게 있겠지요.
“열심히 노력하는 문화에 몸담고 있었던 시간입니다. 사람을 흥분시키고 고조시키죠. 서울은 모든 게 금방 새롭게 바뀌는 도시예요. 따라잡지 못할까 봐 근심하지만, 한편으로 그게 많은 에너지를 줍니다. 한국식 회식도 가끔 그리워요. 처음엔 싫어했다가 이해하면서 즐긴 것에 대한 향수 같아요.”
―이번 토요일 현대자동차 단체 산행에 오라고 한다면요?
“단서가 필요해요. 정의선 부회장이 다시 나를 고용하고 통 큰 연봉을 준다면 아침 7시까지 달려갑니다. 정상 찍고 하산해 오리구이와 막걸리도 먹어야죠(웃음).”
에이렌스는 “한국에서 ‘전장(戰場)의 상처’ 같은 것을 얻었지만 궁극적으로 좋은 경험이었다”며 “그 3년의 시간이 입에 쓴 보약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빨간색 현대 벨로스터로 호텔까지 배웅해 줬다. 한국 노래방 애창곡은 아바(ABBA)의 ‘댄싱퀸’이었다고 했다. 조수석에 앉아 상상했다. 키 190㎝ 미국 남성이 ‘양복 벗고 수영장에 뛰어든’ 한국인들 틈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신나게 춤춰봐 인생은 멋진 거야/ 기억해, 넌 정말 최고의 댄싱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