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그랜저가, 르노삼성에 SM6가 있다면

우리에겐 말리부가 있어요”

이제 안전하지 않은 차가 있을까. 모든 자동차 회사가 안전을 앞세우고 있다. 그 와중에 거대한 쇠공이 날아와 차를 부순 다해도, 컨테이너를 겹겹이 쌓아도 승객석은 안전한 것을 증명한 브랜드가 있다. 쉐보레다. 그런데 오늘은 눈앞에서 정면충돌을 한다고?

아침 일찍부터 서울역 대우재단 빌딩 앞으로 향했다. 경기도 부평에 있는 한국지엠 공장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이곳 대우재단 빌딩에 홍보와 마케팅 등 일부 부서가 상주하며 한국지엠의 서울사무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강남에 일부 부서가 남아있지만 한국지엠의 핵심은 부평에 있다. 사장님도 부사장님도 전무님도 노동조합장님도 모두 부평에 있다. 우리도 부평으로 간다.

한국지엠을 두고 아직 ‘대우자동차’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회사다. 미국 GM의 계열사다. 외국인이 경영을 하고 있고 전 세계 수십 개의 공장 가운데 일부를 우리나라에서 운영한다. 우리나라의 부평과 군산, 창원 공장에서 생산한 차는 전 세계 GM의 유통망을 타고 수출한다. 옛날 대우자동차의 그분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했는데 한국지엠의 차는 이제 세계는 넓고 팔 곳은 많다고 말할 수 있다.

갑자기 쌀쌀해진 초겨울 날씨에 버스기사는 초강력 난방을 해주고 있다. 길에서 혹은 공장에서 꽁꽁 얼어버릴까봐 두둑하게 입은 자신이 멍청해 보인다. 이마에서 삐질 삐질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생각해본다. 나는 왜, 지금 말리부를 보러 가는가.

우리나라에 말리부가 없던 시절 말리부를 찾아갔었다. 갈매기와 팰리컨이 비둘기급으로 많았던 곳

말리부는 올해 4월 출시했다. 대단한 인기였다. 미국에서는 이미 9세대까지 들어선 전통의 모델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낮선 이름이다. 미국에선 쏘나타보다 더 대중차로 인식됐지만 우리나라는 처음이다. 말리부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북쪽의 해변 이름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모르는 이가 많을 듯. 갑자기 갈매기가 감자튀김을 훔쳐 먹던 말리부 해변이 생각났다.

정신을 차리니 말리부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올해 4월 출시. 고척동 돔구장에서 진행한 신차출시행사. 같은 날 현대자동차는 아반떼 스포츠를 출시했다. 우연이겠지. 출시는 이때 했지만 실제 소비자들에게 인도되는 것은 5월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말리부는 선풍적인 인기를 사전계약으로만 증명했고 신차효과가 바랜 현대 쏘나타와 기아 K5는 이를 지켜봐야만 했다.

어찌했건 오늘은 말리부를 다시 보러 간다. 생산 현장에서 말리부를 보여준다니 무엇인가 다른 게 있을 터.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며 그랜저와 SM6가 휩쓸고 있는 인기 몰이에 동참하는 여론을 늘려보려는 속셈인 것도 눈에 보인다.

한국지엠은 보라색의 최신형 센서가 들어간 더미부터 아이들의 연령대에 따라 다르게 구성한 더미까지 갖춰 전 세계 충돌테스트 기준에 맞출 수 있다고 밝혔다.

부평공장 도착 직전에 참가자의 스마트폰에 보안 스티커를 붙인다. 가방에 있는 큰 카메라는 왜 스티커를 붙이지 않았을까. 슬쩍 입구에서 한 장 찍어봤다. 양심상 그 뒤는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국지엠의 부평 공장은 노쇠했다. 우리나라 자동차 생산의 역사와도 비슷할 정도로 이 공장은 오래됐다. 1962년에 승용차를 만드는 공장으로 시작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차들을 만들었다. 이름은 들어봤는가. 맵시나, 로열살롱이라고. 주로 승용차를 만들던 이 공장에서 지금은 말리부와 캡티바를 주로 만들고 있다. 해외에 수출하는 안타라를 만드는데 캡티바의 수출모델이다.

한국지엠 부평공장의 위성사진. 아파트에 둘러싸인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1960년대에는 넓고 넓은 벌판에 공장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아파트 숲 속에 갇혀있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는 생산시설이 이렇게 도심에 들어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충돌테스트장이 보인다. 심지어 몇 해 전까지는 180m의 충돌테스트 주행로에 지붕이 없었다. 눈과 비를 맞는 것은 물론이고 아파트 입주민이 함께 관람하는 테스트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망원렌즈 하나 있었으면 아마도 신선한 사진 여러 장 건졌을 텐데.

이 늙은 공장에서 우리가 볼 것은 말리부다. 조금 전 이야기한 충돌테스트장에서 실제로 한 대를 부숴본다고 한다. 한국지엠은 거창하게 ‘말리부 미디어 아카데미’라고 불렀지만 “그랜저, SM6말고 나에게도 관심을 줘”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각 사가 발표한 중형 세단의 올해 판매량

어제 나온 실적을 살펴보니 말리부는 올해 큰일을 해냈다. 4월 신차출시 이후 매달 3000~5000대 사이를 팔았다. 6월에는 6310대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생산량과 동일하다. 당시 말리부는 계약 후 3개월을 기다려야했다. 즉, 만드는 만큼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 아름답다는 ‘경쟁’이 시작됐다.

이 차는 아니고 오늘 박살날 그 차는 저 뒤에서 대기중

올해 말리부와 함께 중형 세단 시장을 이끈 것은 르노삼성자동차의 SM6다. 말리부 뿐만 아니라 이동네 최고라는 쏘나타의 아성까지도 위협했다. 실제로 택시 판매량을 제외하면 쏘나타의 월간 판매량을 넘어섰다. 더 드라이브가 어제 집계한 올해 중형 세단 판매량 통계에 따르면 말리부와 SM6의 선전으로 중형 세단 시장이 커졌다. 여기에 11월에는 현대자동차가 그랜저를 내놨다. 단번에 4000대를 팔았다. 아직도 몇 달은 기다려야한다니 중형 세단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누군가의 밥그릇을 빼앗은 게 아니라 다 같이 잘 먹는 시대가 됐다. 적어도 중형 세단 시장에서는 그랬다.

지루한 수업시간, 그래도 유익했다.

그랜저를 제외하면 이 차들의 공통점도 있다. 모두 글로벌 세단이라는 것. 말리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차가 미국에서도 동일하게 생산해 판매한다. 전 세계 여기저기 GM 산하의 브랜드로 판매한다는데 일일이 다 기억은 못하겠다. 르노삼성의 SM6 역시 마찬가지다. 르노그룹에서 유럽에도 팔고 우리나라에도 판다. 전 세계인이 같은 차를 탄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항상 외치던 그것 아닌가. 우리도 미국사람들과 같은 차를 타게 해달라.

말리부 아카데미는 지루했다. 기자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등등이 참석한 행사에서 한국지엠 관계자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과 미국, 유럽, 아세안, 남미, 인도의 충돌안전성 테스트 방식과 현황 그리고 에어백, 안전벨트가 얼마나 탑승자의 안전에 기여하는지 아주 꼼꼼한 자료를 내세우며 설명한다.

결론은 이거다. 한국지엠의 차가 안전하다는 것. 그리고 전 세계 어디서도 동일한 품질을 유지한다는 것.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미국과 한국의 품질과 안전이 똑같다는 뜻이다.

몇 가지 더 있다. 부평 공장에서 진행하는 테스트 가운데는 각 나라의 법규보다 50%까지 더 충돌량을 올려 가혹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 법규를 충족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탑승자의 머리가 부딪치는 곳은 모두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이어진 공장 투어. 지루하고 긴 설명을 들었으니 이제 실물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역시 부평공장은 노화했다. 그동안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는 물론, 쌍용, 르노삼성의 공장을 모두 다녀왔고 해외에서는 포드, GM, 르노, 폭스바겐, BMW까지 유명한 브랜드의 공장을 다녀봤지만 대부분 투어를 허용하는 구간은 최신의 공장이거나 역사가 있는 공장인데 부평은 후자에 가깝다.

충돌테스트 시험장에서 곧 있을 그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허름한 건물의 공장이지만 시설은 첨단이다. 특히, 안전을 강조한 이번 방문에서 한국지엠은 말리부를 이곳에서 테스트하고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는 개당 7억 원에 이르는 인체모형 ‘더미’를 이용해 충돌테스트를 하고 10살, 5살, 3살, 10개월 아기의 더미는 물론 인종별 특징도 감안한 더미를 보유해 테스트를 한다고 밝혔다. 보행자 충돌을 감안한 테스트는 보닛에 머리 모형을 발사하는 장치로 진행하고 차대차 충돌을 고려한 실험에서는 유럽, 미국, 한국 등 지역에 따른 법규에 맞춰 실험 조건을 바꿔 진행한다.

드디어 말리부를 부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180m의 레일을 타고 시속 64km/h로 달려온 말리부가 40% 정면충돌한다. 차체의 중앙에서 살짝 비켜난 곳이다.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세계 각국의 충돌테스트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결전의 그 순간

한 여름 태양 빛과 비슷한 수준의 밝은 LED 조명이 들어오고 물방울 튀는 장면을 찍을 수 있는 초고속 카메라가 돌아간다. 레일이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말리부가 부딪친다. 진행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엉덩이를 들썩하며 튕긴 차는 45도쯤 방향을 틀어 정차했다. 파편은 사방으로 튀었고 멀리서 봐도 에어백이 모두 폭발했다.

선을 그은 그대로 딱 충돌했다

이번 행사를 위해 과감하게 차 한 대를 충돌시킨 한국지엠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신기한 광경은 눈앞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인데 최근에는 몇 차례 공개됐다. 작년 현대자동차가 미국과 한국의 차가 안전에 차이가 없다며 공개적으로 충돌했던 바. 유명한 테스트가 됐다.

미국과 한국에서 각종 충돌테스트 최고 점수를 받았던 말리부는 역시 문제가 없음을 입증했다. 에어백은 모두 폭발했고 A필러가 부분부분 구부러지며 충격을 흡수했다. 그래도 문짝은 충돌 당시에 열리지 않았고 나중에 손잡이를 잡아당겨 여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범퍼와 보닛과 휀더와 앞바퀴와 라디에이터와 엔진은 비록 망가졌지만 안에 앉아있는 값비싼 더미들은 안전해보였다.

마지막은 역시 맛있는 음식사진으로…말리부의 갈매기가 호시탐탐 노리던 그 음식들

아침부터 모여서 길고 전문적인 설명도 들었고, 실제로 자동차의 충돌테스트도 보여줬으니 이제 한국지엠이 본색을 드러낼 차례다. 한국지엠 관계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이달 부터는 토요일도 공장을 가동해서 기존 3달 이상 기다리던 소비자들의 출고 대기 기간을 1달 미만으로 줄이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지엠은 언제나 가장 안전한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돌아오는 길. 곳곳에 서 있는 위장막의 차들을 보고도 슬쩍 사진 한 장이라도 찍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 삼촌, 형제의 직장에 다녀온 느낌이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놀랍지도 엄청나지도 않은 구경이었지만 역사와 전통과 철학 속에서 어떤 차를 만들려는 지 어렴풋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분명했다. SS6, 그랜저 볼 때 말리부도 한번 봐 달라는 사실. 그리고 이 차들은 경쟁을 시작했고 혜택은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더 드라이브=dail.lee@thedriv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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